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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왜 뛰어난가?(충효예실천운동본부 공동총재)

송병승 | 조회 810

 

훈민정음, 왜 뛰어난가?

-국보 제70호 귀중한 자산-

 

송병승(충효예실천운동본부 공동총재)

조선왕조 제4대 왕 세종(1418~1450)은 약 32년의 재위 기간 중 공적이 가장 많은 성군이다.

첫 번째 공적이 훈민정음 창제이다. 당시에는 이웃 나라 명()이 유교 문화를 앞세우며 상전 노릇을 하여 조선의 많은 신하가 사대주의에 물들어 한자(漢字)를 익히는데 몰두했다. 세종은 이러한 시대 상황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조선의 중흥에 무엇이 선행해야 하는가, 노심초사하던 중 문자혁명이 급선무임을 인지하고 드디어 훈민정음 창제를 이루어 냈다. 반대하는 신하들을 물리치고 조목조목 반박하며 그들을 설득했다. 훈민정음 반포를 훈민정음 해례본 (세종 281446)에서 알게 하고 929일 자 세종실록에서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훈민정음 창제의 정신은 자주정신, 애민정신 (민본정신) 실용정신이다. 이는 백성 우선주의로 왕은 백성 위에 군림하는 존재가 아니고 오로지 백성이 있으므로 해서 왕이 존재한다는 평등사상에 근거하고 있다. 훈민정음 창제의 원리와 반포에 관한 여러 설명을 생략하고 훈민정음이 왜 뛰어난가? 중요한 핵심을 밝힌다.

 

첫째, 억눌림이 없는 자주정신, 독립정신이다. 지정학적인 요건 속에 중국의 위협과 일본의 대륙침탈을 완전히 봉쇄코자 하는 세종의 당당한 통치술이다.

 

둘째, 흠이 없는 과학적 독창적 창제이다. 제자원리가 추상적이 아닌 구체적이고 무슨 소리든 완벽하게 소화할 수 있는 문자이다.

 

한자는 4만 자가 있고 일본 문자는 100자가 겨우 넘는데 우리 훈민정음은 28(, , , ㅿ의 네 글자 없어짐) 24자로 모든 발음을 할 수 있어 세계 언어학자가 경탄하고 있다. 그리고 왕을 보필하는 학자가 옆에 있어 훈민정음 창제가 원활히 진행되었고 둘째 딸 정의 공주가 끝까지 아버지 세종을 도와 순항할 수 있었다. 세종은 미우나 고우나 애국하는 충성심, 조상에게 어버이에게 지극정성 후손의 도리를 하는 신하를 등용, 이른바 효··예 사상 정립에 솔선수범하는 진실한 군주였다. 무릇 현대에 있는 위정자와 국민이 본받아야 한다.

 

훈민정음으로 간행한 문헌이 용비어천가,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 월인석보 등 다양하다. 한자를 배격하지 않고 국한문 혼용체의 성격을 살려 한자를 익히고 언해본으로 훈민정음을 배우게 했다. 조선왕조는 남존여비 사상이 팽배하여 여성을 비하하는 풍조가 있어 언문(言文) 운운하여 낮추어 상민이 쓰는 말로 모독하기도 했다. 그 실례가 암클이다. 하지만 학식 있는 여성들이 앞다투어 계축일기, 한중록, 인현왕후전 등 내간체 문헌이 세상에 나왔다.

 

노래로 표현된 문헌 악장가사, 악학궤범, 시용향악보가 있고 조선 중기 대학자 정철의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 훈민가 등도 빼놓을 수 없다. 윤선도의 어부사시사, 오우가 그리고 최초의 한글 소설 허균의 홍길동전이 있고 춘향전, 심청전, 흥부전 등 나열하기가 어렵다. 우리는 신경준, 유희, 유길준, 주시경, 이윤재, 최현배, 김윤경, 정인승들 유명한 한글학자가 탄생 오늘의 훈민정음이 한글로 승화했다. 국어순화 운동을 펼쳐 외래어 남발 억제, 말모이를 이은 한글 사전 보급으로 한글사랑 나라 사랑으로 국립한글 박물관 확충과 사단법인 훈민정음기념사업회의 거국적인 사업에 적극 동참하기를 기대한다. 덧붙여 세종학당이 세계에 퍼져 있는데 더욱더 설립되기를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