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종 위원회
훈민정음출판추진위원회
우리가 몰랐던 세종
(소설 ‘훈민정음’속 세종의 위대함)
경인신문 김신근 취재부장
우리가 상식으로 알고 있는 세종은 조선시대 4대 임금으로 훈민정음 창제는 물론 농업ㆍ과학ㆍ예술 등 모든 분야에서 눈에 띄는 성과를 내면서 혼란스러웠던 개국초기 조선을 태평시대로 만든 인물이다.
제왕으로서 치세(治世)는 여러 방면에서 성과를 낼 수 있지만, 세종의 업적으로 꼽히는 대부분의 것은 양반이라 불리는 지도층은 물론, 양인과 노비 모두를 아우르는 친(親)백성적인 면이라는 것에서 주목할 만하다.
특히 훈민정음 창제는 역대 제왕 중 누구도 생각해낼 수 없는 독창적인 치적이다.
당시 일부 지도층만이 한자로 된 책자를 통해 지식체계를 이어가던 전통은 훈민정음이 반포되면서 모든 백성들에게 통용될 수 있게 됐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반포하기까지 순조로운 과정의 연속은 아닐 것이다.
훈민정음을 창제하겠다고 마음먹은 동기, 당시 뜻문자였던 한자에서 소리문자였던 훈민정음을 만드는 과정, 기득권 세력의 반대에 대한 논쟁과 설득 등.
어느 것 하나 쉬운 과정이 없었지만 세종은 천재성과 뚝심으로 자신의 뜻을 돌파해 나갔고, 결국 한민족 최고의 발명품인 훈민정음을 선보이게 되었다.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 과정을 비교적 자세히 설명한 책이 박재성의 ‘소설로 만나는 세종실록 속 훈민정음’이다.
본 글은 소설 속에 묘사된 세종의 고뇌와 결단, 그리고 갈등과 해결 과정을 보면서 세종의 위대함을 되짚어 보았다.
세종은 왕이 되면서 새로운 문화정치를 폈다.
그는 문치의 시대를 열기 위한 기초과정으로 주자소와 집현전을 중시했다.
주자소에서 활자를 다시 장만해 고금의 전적을 자유로이 출판하게 하고 집현전에는 젊은 인재를 모아 지금 당장 필요한 전적을 저술케 하려는 계획이었다.
또한 세종은 적재적소에 필요한 인재를 배치할 줄 아는 용인(用人)의 달인이었다.
세종이 사람을 바로 살펴서 그 쓰임을 적절히 하는 것은 타고난 성품인지도 모른다.
정인지를 학문의 우두머리로 삼으려는 생각, 김종서로 하여금 국토의 개척과 국경의 정비에 쓰려는 생각, 관노의 신분이었던 장영실을 상의원 별좌에 제수하여 천문기기를 만들려는 생각 등, 예사 임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들을 삼십 안쪽에 구상한다는 것이 세종의 성군 됨을 가치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27쪽)
임금이 사람을 쓰는 것은 목수가 나무를 쓰는 일과 비교되기도 한다. 크고 작은 것, 길고 짧은 것, 아름답고 미운 재목을 잘 살펴서 그 쓰임을 적절히 하면 버릴 것이 없다는 것이 목수의 양식이다. 그러므로 임금은 군자를 가까이하고 소인을 멀리해야 한다. 이와 같은 정치의 운용을 세종은 알고 있었다. (26쪽)
조선시대는 농업이 나라의 근간이었다. 그러나 매년 가뭄에 시달리면서 임금은 기우제를 올리고 도살을 금지케 하는 등 사람이 해야 할 소임을 다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농사가 제대로 되지 않는 것은 가뭄 이외에 영농 방법 개선도 필요했다. 경상도와 충청도가 지역마다 파종 시기가 다르고 산간과 평지가 다르기 때문에 이를 소상히 적은 책을 백성들이 읽게 해야 했다.
<농상집요>, <사시찬요> 등 농사에 필요한 전적을 간행해도 백성들은 읽을 수 없었다.
세종은 안타까웠다. 백성들이 쉽게 익힐 수 있는 다른 문자가 있기 전에는 해결책이 없었다.
쉬운 문자라….
세종은 사대부만을 위해 전적을 간행하고자 하지는 않았다. 모든 것을 백성들과 연관해서 생각하는 것이었다. (26쪽)
세종은 백성들의 도덕을 함양하게 하려고 총신, 효자, 열부 이야기를 모아 <삼강행실>이라는 책을 편찬 간행하도록 직제학 설순에게 명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일반 백성들이 소위 진서라는 한문을 몰라 익히고 배울 수가 없었다. 이를 답답하게 생각하고 있는 세종에게 어느 날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떠올랐다.
‘한자를 모르는 백성도 알아보게 그림을 그려 넣도록 하자.’
그렇게 해서 당대 제일 화가로 유명한 <몽유도원도>를 그린 안견 등을 시켜 ‘삼강행실’에 그림을 곁들이게 하여 <삼강행실도>로 다시 간행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 책 또한 완전하지 못했다.
‘백성들이 쉽게 배워 편하게 쓸 수 없는 글이 없을까?’
새로운 글자의 필요성에 대해 골몰한 세종은 마침내 마음 속에 감춰두었던 소원을 이루어야 겠다고 생각한다.
바로 문자 창제였다. (30쪽)
과학적인 영농을 하게 하려고 <농사직설>과 같은 전적을 간행했으나, 그것이 모두 한자로 쓰인 책이어서 백성들에게 읽히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듣고서 세종은 안타까이 여기고 있었다. 여기에 더하여 백성들이 글을 몰랐던 탓으로 송사나 옥사가 공평치 못하다는 사실이 더욱 세종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31쪽)
백성들은 고위 관리들과 면담할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 글로써 호소해야 하는데 정작 글을 쓸 줄 모르고 있었으니 상하의 의사가 바르게 소통될 까닭이 없었다.
‘소리 나는 대로 적을 수 있는 글자가 있어야 한다. 또 그것은 누구나 쉽게 익혀서 쓸 수 있는 글자이어야 한다.’
이런 생각까지 이른 세종은 새 문자 창제가 새로운 불씨라며 들고 일어난 반대 상소를 미리 짐작하고는 중신들 몰래 외로운 연구를 시작했다. (32쪽)
문자 창제를 마음먹은 세종은 다음 단계로 집현전 학자를 비롯한 대소 신료들에 대한 저항에 대응하는 논리 개발과 설득에 들어갔다.
‘소리 나는 대로 적는다’
대소 신료들이 한자만이 최상의 문자라고 믿고 있던 시절이기 때문이었다. (33쪽)
“전하, 비록 우리에게 고유한 문자가 없다고는 하나, 지금 저희가 한자로써 모든 의사나 학문을 나타냄에 아무 불편이 없는 것으로 아옵니다.”
성삼문이었다.
“허허허, 그것은 너의 경우일 것이야. 네 아내와 네 집 하인들이 한자로써 하고자 하는 말을 적을 수 있다고 보느냐?” (38쪽)
이번에는 신숙주가 입을 열었다.
“전하, 이 나라는 지난 천여 년을 사대모화하고 있사옵니다. 한자를 쓰는 것은 당연한 일이 옵니다.”
“잠깐! 이 나라의 어리석은 백성들에게 배우기 쉽고 쓰기 편한 문자를 주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쉽게 쓰게 하는 것이 사대모화를 하지 말자는 뜻이 아니다.” (41쪽)
이렇게 설득한 성삼문과 신숙주는 훈민정음 창제에 주역이 되었다.
세종은 지난한 창제과정을 거쳐 누구나 배우고 사용이 쉬운 28자의 독창적이고 과학적인 훈민정음을 즉위 25년(1443년) 창제했고, 이를 28년(1446년)에 반포했다.
세종은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반포하는데 그치지 않고 활용을 제도화하는데도 힘썼다.
세종은 훈민정음 반포후 의정부와 육조에 다음과 같이 전지를 내렸다.
“과인이 정음을 창제한 것은 어리석은 백성들이라도 자기의 생각을 글로 적을 수 있게 함이었다. 그러나 글자만 만들고 사용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니, 금후부터는 조정의 모든 공문서를 정음으로 작성할 것이며, 이과와 이전의 취재 때에도 정음을 시험하여, 비록 깊은 뜻은 통하지 못하더라도 능히 합자하는 사람을 등용토록 하라!”
세종의 노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다음 해인 세종 29년(1447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정음 서사시 <용비어천가>를 자세히 해석한 <용비어천가주해>를 간행하여 각 관리에게 나누어 주었고, 9월에는 신숙주와 성삼문을 독려하여 <동국정운> 6권을 완성시켰다. 이 <동국정운> 완성으로 그동안 지방과 사람에 따라 다르게 발음되던 한자음이 하나로 통일되었고, 방언의 차이까지도 해소하게 하였으니 이를 어찌 위업이라 아니하리! (173쪽)
그로부터 570여년이 지난 지금.
특허청은 2017년 5월 발명의 날 제52주년을 맞아 온라인 투표를 통해 ‘우리나라 빛낸 발명품 10선’을 선정했다. 여기에서 훈민정음은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다. 세종의 후손들도 훈민정음의 위대함을 알고 있는 것이다.
현재 우리는 K-컬처로 불리는 문화강국으로 우뚝 서 있다. 그 중심에는 세종대왕이 창제하신 훈민정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