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과 나(청주시의회 사무관)
이한나 | 조회 464
훈민정음과 나
이한나(청주시의회 사무관)
‘스며들다’라는 단어를 유독 좋아한다. 시나브로 스며들면서 내면화되는 힘은 그 어떤 강압과 권력보다도 세고 굳건하며 불변한다고 믿는다. 지금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것 또한 세상에 첫발을 내딛던 생애 최초의 순간부터 시작된 교육과 사회화와 모든 것이 스며든 내면화의 힘일 것이다. 그리고, 훈민정음 또한 내 삶의 최초부터 내게 스며든 또 하나의 ‘나’이다.
1. 필연
나는 X세대였다. 경제적 풍요 속에 기존 사회질서에서 벗어나 새로운 질서와 기준을 만드는 격동기의 시대였다고 하는 그 시기다. 나는 주위의 눈치를 보지 않는 개성이 자연스럽게 인정되는 X세대라는 이름의 자유를 빙자했다. 전통이나 관습, 혈연 등 ‘옛것’이라는 이름의 것들은 왠지 나와 어울리지 않아 보였고, 옛것이 내게 머무르길 의식적으로 거부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날 나는 결국 -유년기와 청년기를 거쳐 성인이 되고 나서도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어느새 내게 스며든 ‘금성대군 18대손’이라는 옛것을 떠올려야만 했다. 그 어느 날은 아버지의 장례식이었다. 늦은 밤, 얇은 비닐 식탁보를 두른 탁자 앞에 먼 친척쯤일까 아니면 옛 고향 지인쯤일까 하는 지긋한 두 분이 앉았다. 미지근한 육개장을 담아낸 쟁반을 탁자에 내밀 때쯤이었다. 두 분이 나누는 이야기 속에 ‘금성대군’이라는 단어만 유독 명확하고 또렷이 들리면서 ‘옛것’이 살아났다.
아버지는 생전에 늘 한 잔의 술에 ‘금성대군 18대손’이라는 추임새를 오래오래 반복적으로 달았다. 밑도 끝도 없이 먼 옛날 누군가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을 내보이는 아버지의 추임새는 어린 내게 고리타분한 옛 족보였을 뿐이다. 머리가 좀 더 굵어지고 찾아본 역사 속에서는 단종의 복위를 꿈꿨던 어느 친족의 이야기에 불과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다시 만난 ‘금성대군’의 후손이라는 옛것은 아버지가 내게 남긴 유산으로 다시 태어났다. 되돌아보면, 아버지는 내게 세종과 훈민정음의 정신을 자연스럽게 내재화하길 기다리셨던 게 아닐까.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의 여섯째 아들 ‘금성대군’의 18대손으로서 나에게 훈민정음은 태어나기 전부터 나에게 스며든 ‘필연’의 역사였다고 믿는다.
2. 인연
-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가장 먼저 시작하는 글쓰기가 이름 쓰기였다. 자신의 이름부터 시작해서 가족, 친척, 기타의 이름으로 뻗어 나간다. 그리고 고학년쯤이 되면 한자 숙제가 시작되었다. 다시 한자로 자신의 이름 쓰기부터 시작해서 가족, 친척, 기타로 확장해나간다. 이쯤에서 한자 숙제를 받았을 때 오묘 야릇한 자부심이 있었음을 고백한다. 친구들이 한자로 자신의 이름 열 번 쓰기 숙제를 제출할 때, 나는 부모님의 성함으로 한자 열 번 쓰기를 제출했다. 내 이름은 한자가 아닌 순 한글이었다.
아버지는 내 이름에 대해 늘 반복해서 이야기해주셨다. 묻지 않아도, 이미 내가 알고 있음은 아랑곳없이 반복되었다. 아버지 자신이 무수히 많은 고민 속에 지어낸 작품이었다. ‘한’은 ‘한글’의 ‘한’과 같은 우리말로 ‘크다’,‘하나’,‘오직’의 뜻이며 ‘나’는 ‘나’ 자신이라는 의미였다. 어린 내 마음엔 한자가 아닌 우리말 이름이어서 특색있고 한자로 이름을 쓰지 않아도 되어서 좋을 뿐이었다. 나이를 먹어가고 철이 들기 시작하면서는 이름이 주는 ‘무게감’이 어느덧 느껴졌다. ‘크고 세상에 하나뿐인 나’, 소위 이름값이라는 책임감이 내게 스며들었고, 언젠가부터는 이름값을 따라가지 못하는 나의 처지와 현실이 스스로 자격지심마저 들 정도였다. 그런데도 지금 이름값은 내게 힘이다. 언젠가는 이름값을 해야겠다는 작은 의지가 나를 지금보다 한 발 더 내딛는 디딤돌이 되어주고 있음은 분명하다. 나의 ‘최초’와 함께 시작된 ‘한나’라는 이름은 세종대왕의 여섯째 아들인 금성대군의 18대손으로서 당연히 가져야만 하는 훈민정음과의 인연이었고, 아버지가 내게 다시 물려주신 또 하나의 유산이다.
3. 운명
세종의 후손이라는 ‘필연’과 아버지가 선사해주신 한글 이름의 ‘인연’이라는 - 지극히 개인적이면서 자기 위안적인 - 자부심에서 시작했지만, 내 삶에 훈민정음은 ‘운명’이다.
공직생활을 하면서 ‘내수읍 초정리’ 문화관광사업 업무를 담당한 적이 있다.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 초정리는 세계 3대 광천수로 알려진 초정약수와 세종대왕의 행궁 치료와 훈민정음 창제 마무리 이야기가 가득한 곳이다. 훈민정음 반포(1446년)를 2년 앞두고 눈병에 시달린 세종은 1444년 초정리에 행궁을 차리고 121일 동안 머물며 약수로 눈병을 치료했는데, 이곳에서 세종이 훈민정음 창제의 과업을 마무리했을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하지만 초정은 그 가치를 빛내지 못하고 한동안 잊혀 있었고, 약수는 갈수록 고갈되었다. 지역은 작은 이익을 탐하는 난개발로 뒤덮여, 그 작은 마을에 지하수를 뽑아 올리는 취수공이 80여 개나 된다. 초정 문화관광 담당자였던 나는 초정에 심취하고 이러한 현실에 분노했다. 지역을 보전하기 위한 작은 발버둥의 흔적이라도 초정에 남기고자 고민하고 노력하던 시기도 있었다.
이제 초정에는 약수를 보전하고 체계적으로 지역을 알리고자 하는 사업들이 진행 중이다. 그중 한창 추진 중인 훈민정음 기념사업은 훈민정음 창제를 기념하고 세종 정신을 함양하는 세계문자공원 조성과 훈민정음 탑 건립 등 초정리에 깃든 세종과 훈민정음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발걸음이 될 것이다.
훈민정음 기념사업에 대해 곱씹던 2022년 어느 날, 훈민정음 해설사 자격증을 취득해야 할 것 같았다. 의도도 준비도 커다란 목표도 없이, 그냥 해설사가 되어야만 할 것 같았다. 필연으로 시작해서 인연이 되고, 이제 운명처럼 해설사가 되었다. 어느새 초정과 훈민정음은 나의 삶에 스며들었다. 이제 나는 훈민정음과 함께 초정에 살으리랏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