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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날 아침에(전 충청북도 문화공보실장)

송주헌 | 조회 453

 

한글날 아침에

 

송주헌

 

한글이 세계의 으뜸임을 모르는 국민은 없다. 우리뿐 아니라 세계의 모든 언어학자가 한글의 우수성에 대해서는 이미 감탄하고 극찬하고 있다.

한글의 우수성은 2009년과 2021년 열린 세계문자올림픽에서 두 차례 모두 최우수상을 받음으로써 증명된 바 있다. 만든 사람이 분명하고 만든 동기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에 바탕을 두었으며 만든 시점이 분명한 한글이야말로 우리의 보배요 자랑이며 이 나라에 사는 모든 이의 행복이기도 하다.

한자가 상류사회의 한 부류에만 쓰여 수많은 하층계급 사람들은 제 이름조차 쓸 줄 모르는 안타까운 현실을 굽어살피신 세종대왕께서 그 어리석은 백성들을 위해 밤잠을 설치시며 뼈를 깎는 노력 끝에 마침내 훈민정음이라는 새로운 문자를 만드셨다. 백성을 사랑하시는 그 넓은 마음을 우리가 어찌 잊으리오.

한글의 우수성이나 위대성에 대해서는 온 국민이 다 아는 일이지만 그 위대한 임금께서 지으신 아름다운 우리 말과 글이 외래어와 외계에서나 쓸 만한 요상한 문자로 더럽혀지고 버려지는 근래 우리 언어생활을 돌아보면 우리 스스로 부끄러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내가 충청북도 문화공보실에 근무할 때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게 보내는 도지사의 편지를 대신 쓴 적이 있다. 거기에 집안은 두루 편안하시고 백복이 가득 하시기를 바랍니다라는 식으로 썼는데 도지사가 그 원고 위에 상대가 상대인 만큼 경어를 써야 하는데 글이 불경하니 기획관리실장이 다시 교열을 해서 보내라라고 써서 되돌려 보냈다. 기획관리실장이 보담(寶覃:편지글에서 상대편의 집안을 높여 이르는 말)이 여경(如慶)하시며 만복이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로 고쳤다. 그것을 받고 보니 받는 이가 알아보지도 못할 한자를 쓰는 것이 존경하는 것으로 여기고, 내가 지사의 안목으로 글을 써야 하는데 내 생각대로 한글로 쓴 것을 마치 상대를 깔본 걸로 여기는 것이 되어 못마땅했다.

이 시절 충청북도 지명지(地名誌)를 편찬 발간했는데 원고는 지리전문가들이 썼고 편집은 나를 비롯한 문화재과 직원들이 맡았다. 그 책에는 한자로 된 마을 이름 아래 우리말 이름이 적혀있었다. 예를 들면 추동리(楸洞里):가래울, 학평리(鶴坪里):두룸벌, 학동(鶴洞):황새울, 호암리(虎岩里):범박골 등이다. 한자로 된 이름은 시골선비들이 쓰는 이름이고 한글 이름은 마을 사람들이 부르는 이름이다. 이처럼 글을 아는 사람들이 한글을 업신여기고 한자가 마치 자기들 글인 양 즐겨 썼다. 지금 통용되는 행정구역 이름은 한자이름으로 마을의 유래나 특성을 알기 어렵다.

이제는 시대가 바뀌어 한자를 즐겨 쓰던 세월도 가고 젊은이들은 뜻도 모르는 한자어와 외래어로 소통한다. 상가의 간판들조차 시대의 흐름에 따라 뜻도 모르는 외래어로 된 것이 대부분이다.

한글날 아침 일간신문의 기사를 읽었다. 한국문화에 관심을 두고 한국을 방문한 독일인이 ‘LOWE’라는 미용실 간판을 보고 놀랐다는 기사이다. ‘LOWE’는 독일어로 사자를 뜻하는데 미용실에서 머리를 사자 모양으로 해주는 거로 생각했다고 한다. 또한, 어느 기자가 줄지어 늘어선 상가의 열군데 간판을 보니 그중 한군데만이 이라고 쓴 부동산 가게였다고 하니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한심한 한글날의 풍경이다. 이처럼 우리의 말과 글이 예전에는 한자에, 오늘날은 외래어에 침범당하는 현실이 세종대왕께 부끄럽다.

우리 딸들이 자주 다니는 밀리네라는 미용실이 있다. 이 석 자에는 손님이 밀리도록 왔으면 좋겠다는 주인의 갸륵한 생각이 담겨있다. 아름다운 우리말 우리글이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우리의 말과 글은 민족의 혼이요 민족의 정신인데 이처럼 외래어에 짓밟히고 뜻도 모를 인터넷 용어의 줄임말로 이미 자리를 잡고 있으니 그것을 부끄럽게 느끼지 못하는 어리석은 백성들이 한글날 아침에 깊이 뉘우치고 깨달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