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와 찌아찌아의 기막힌 인연(전 HCN충북방송 대표이사)
안남영 | 조회 467
청주와 찌아찌아의 기막힌 인연
안남영(전 HCN충북방송 대표이사)
따지고 보면 한글에 빚진 사람이 많다. 아니, 우리나라 사람이면 모두가 그렇다. 한글 덕분에 먹고사는 직업인이 아니라도 세종대왕의 은혜를 입고 산다는 사실을 어찌 모를 수 있을까. 21세기 디지털시대 한글의 효용성이 새삼 부각되고 있거니와, 더욱 주목하고 기억할 것은 그 기능성만이 아니라 창제 정신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도네시아를 다녀온 것은 세종대왕의 ‘선한 영향력’이 5백 년을 훌쩍 넘어 5,000㎞ 너머에 뻗치고 있음을 확인한 소중한 경험이었다. 한글을 표기문자로 사용하고 있는 찌아찌아족이 많이 사는 바우바우시를 방문한 건 지난 8월. 개인적으로 5년 만의 재방문이다.
충북문화예술포럼 2022년 국제교류사업으로 추진된 것인데, 회원 10명이 동행했다. 음악가 2명, 미술작가 7명에, 필자가 포럼 운영위원 자격으로 참가했다. 예술적 교류를 명분으로 출발했지만, 학교 외에 파트너십 구축이 미흡하다 보니 친선방문의 성격이 짙을 수밖에 없었다. 비행기 연착 등 현지 일정 차질로 수업 참관은 초등학교 1곳만 가능했다. 일행은 학교 풍경화를 그려 기증하고, 아이들 이름을 하나하나 카드에 붓글씨로 써서 주거나, 커뮤니티 아트 차원에서 도자기 작품 전사에 쓸 디자인용으로 아이들에게 글씨(한글)를 받기도 했다. 아이들에게 한 자루씩 나눠주려고 준비해 간 볼펜 700개는 일행이 귀국한 뒤 각각 전달됐다.
현재 바우바우시에서는 8개 학교가 훈민정음의 역사를 써 내려가고 있다. 초등학교 4군데(3·4학년 때), 중학교 1군데(1학년 때)에서 한글을 배운다. 고등학교 3군데에서는 제2외국어로 한국어를 배운다. 5년 전 방문했을 때는 초교 2군데, 고교 1군데에 불과했지만, 현지에서 10여년 간 한국어를 가르쳐온 정덕영 씨가 보조교사를 3명 양성한 덕분에 수업을 늘릴 수 있었다.
적절한 표현은 아니지만 ‘한글 수출 1호’라고 하여 한글날만 되면 관심을 끌어온 찌아찌아족 이야기는 세간에 다소 과장된 상태로 알려진 바가 많다. 부족 전체가 한글을 쓰는 줄로 알거나 모두가 한국어를 배워 한국어가 통하는 곳쯤으로 오해하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아직 한글을 익히는 찌아찌아족은 일부 학생들에 불과하고, 한국어를 배우는 학생들도 외국어로 선택을 한, 제한된 숫자에 머물고 있다. 국내 언론에 영상으로 소개된 한글 간판도 일부 구역에만 있을 뿐 도시 전체에 설치된 건 아니다.
이런 점에서 한글과 찌아찌아족의 인연이 뭔가 여물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행스러운 것은 찌아찌아족을 응원하는 단체나 기업, 일반 국민 등의 관심이 식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 국내 모 보험사가 현지에 ‘찌아찌아 한글학교’를 지어줬다. 개교식은 포럼 방문단이 귀국한 지 며칠 안 돼 열렸다. 현대식으로 지어져 돈만 있으면 기숙학교로 운영할 수도 있지만, 교사 수급이 관건이다.
이따금 종교단체나 문화단체의 방문이 이어지고 있어도 정말 붐이라 할 정도로 한글교육에 새바람을 일으키려면 각계의 노력이 체계적으로 이뤄져야 할 것 같다. 무엇보다 한국어교원의 확보가 어렵다는 점이 걸림돌이다. 필자는 5년 전 코이카 단원으로 인도네시아에 체류할 때 휴가를 얻어 바우바우에 간 적이 있다. 당시 한류 열풍이 그곳에도 거세게 불었음을 실감했지만 한국어(한글) 교육에 필요한 교재와 교사 부족 문제 때문에 한 발자국도 못 나가고 있음을 눈으로 확인했다. 이에 보고서를 작성해 인도네시아 코이카사무소에 제출하고 귀국해서는 코이카 본부에 대책을 정식 건의했다. 그러나 사정은 그리 녹록지 않아 공식 단원 파견은 기대가 요원하다. 코이카 같은 기관(정부 출연 재단)이 교사를 파견하기 위해 현지 학교가 접촉해 봤자 정부의 비자 발급이 쉽지 않기 때문이란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현지의 필요에 따른 한글 교육은 자치나 민간참여라는 차원에서 허용하지만, 한국의 공공기관이 관여하는 것처럼 보이는 행위는 껄끄러워한다는 게 이유다.
그럼에도 청주시는 앞으로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정덕영 씨의 제자로 찌아찌아의 피가 흐르는 처녀하고 청주 총각이 2019년 결혼, 두 지역은 사돈지간이 되었기 때문이다(중앙일보 2019년11월13일 보도). 현재 이 부부는 바우바우라는 프론티어에서 어린 아들딸과 살며 ‘훈민정음 일꾼’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런 만큼 청주와 바우바우시는 새로운 한글 스토리를 창작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하겠다. 민간교류의 물꼬는 이미 트였다. 지혜와 노력만 있다면 그 물길을 넓혀갈 수 있다. 특히 청주는 훈민정음이 완성된 역사적 고장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