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또한 전하 책임이옵니다.(㈜한얼경제사업연구원 대표)
전병제 | 조회 507
이 또한 전하 책임이옵니다.
전병제(㈜한얼경제사업연구원 대표)
민주주의의 요체는 특정 충돌 가치에 대한 50.1% 이상과 49.9% 이하 간 공존이라고 볼 수 있는데 서로 100%를 장악하겠다는 이루어질 수 없는 욕망으로 사회의 금도(襟度)는 실종되고 있다. 특히 어떤 정치적 이슈가 부상하면 즉각 세계 최고 수준의 IT 강국답게 SNS 커뮤니티에서는 가뜩이나 분단된 나라가 그나마 다시 두 조각이 날 듯한 기세로 세계 최고 속도와 물량의 저질스런 공방이 불꽃을 튄다.
그런데 병이 의심가는 몇몇 커뮤니티나 악플러가 아니라면, 진영의 반목을 거의 찿아 볼 수 없이 일치단결하고 같은 겨레임을 서로 자랑스러워하는 청정구역이 있다. 예컨대 한류, 국방무기, 고구려⋅발해의 고토 회복, 명량⋅한산의 이순신, 중국 축구 돌려까기, 근자감 뿜는 일본 뭉개기 등이 그것이다. 이 중 단연 두드러져 거의 종교에 필적하는 충성심을 보이는 대상이 있다. 세종과 훈민정음(한글)이다.
과장이 아니다. 훈민정음의 탁월성과 세종의 전인성(全人性)을 조명하는 인문학 강의가 유튜브에 올려지기라도 하면 당장 수백 수천 개의 댓글이 달리는데, 세종은 교주이시고, 한글은 경전이며 우리는 그 은혜를 입은 신도이옵니다, 하는 분위기다.
* 세종대왕님 당신이 스스로의 시력을 희생해 가며 만드신 한글, 저 또한 당신의 백성 중 한 명으로서 늘 감사하며 살고 있습니다.
* 세종이 한국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고? 감히 다빈치 따위로 어디서 개소리를...
* 한글이 없었다면 오늘날 한류가 있었을까요? 정말이지 세종대왕은 시대를 앞선 군주이자 백성의 어버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는 왕입니다..!!
* 세종대왕님 진짜 진짜 환생하고 또 하고 지구 멸망하고 새 행성 가시더라도 만수무강 하세요!! 인간사 지겨우심 하늘에서 천수 만수 누리세요. 정말 감사합니다!!
* 대왕 아닌 태왕이시다. 세종태왕 만세~! 대한민국 만세~! 훈민정음 만세~!
* 한글 없었어 봐, 일본처럼 한자 겁나 써야 했을 텐데, 내 머리 생각하면 끔찍함
* 한글이 세계 공용문자가 되기 위해서는 훈민정음 28자를 복원해야 한다.
* 천지인 키보드 시스템, 볼 때마다 놀랍다. 컴퓨터 언어도 한글 베이스로 만들자.
* 세계 최고 문자를 가진 나라에서 태어난 건 금수저로 태어난 것 못지 않은 행운
* 28개 자모가 거의 모든 소리를 담을 수 있다, 세종대왕은 외계인이었다!
* 신사임당이 5만인데 세종대왕이 1만이다. 뭔가 잘못된 듯. 하긴 이순신 장군이...
* 중국의 문화 도적질을 내다 보시고 “중국과 다르다”고 미리 못 박은 신의 한 수
* 국보 1호는 숭례문 아닌 훈민정음(해례본)이 되어야 한다.
이보다 더 국민과 사회와 의식마저 통합하는 구심점이 있을까? 단순 생활도구로서의 문자를 뛰어넘는, 세계가 부러워 하는 세종과 한글의 또 다른 권능이다.
다만 여기서 사소한 문제가 하나 있다. 일상의 편의를 넘어 디지털과 인터넷 시대에 최적화한 성능이다 보니 간혹 옥의 티이듯 부작용이 발생한다. 이런 댓글처럼.
* 한글이 (SNS상에서) 욕하기엔 정말 최고가 아닐까 싶다.
서두에서 본, 정치 이슈를 놓고 시전되는 욕 기반 저질 논쟁의 구동 엔진이 우리 한글일 수 있다는 의미다. 너무나 사용하기 쉽고 거기에다 온갖 생리적 발음들을 창조하다시피 표기할 수 있는 문자 체계이다 보니 생각이고 뭐고 다듬을 새 없이 혀 끝에 떠오르는 감정을 한자나 가나에 비해 일곱배나 빠른 속도로 즉각 배설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어떤 이슈에 대한 한중일 네티즌들의 댓글을 비교할 때, 종종 선택 단어나 논리의 품위에서 우리나라가 밀리는 경향이 그 결과다.
이쯤 생뚱맞지만 호강에 겨운 투정이 생긴다. “언어 순화 또한 세종 전하의 책임 아니옵니까?” 물론 전하는 빙그레 웃기만 하실 것 같다. 누가 이런 댓글을 남겼다.
* 그저 편안케 하고저 할 따름이니라 하셨죠. 흐뭇 하시긋죠^^ 쿨한 냥반임
생각해 보니 시중의 장삼이사가 부조리한 권위에 대해 자유롭게 욕하는 한글 사발통문이야 말로 진정한 민주주의의 시초이기도 하겠다. 한자와 가나로서는 도저히 구현 못할 경지다. 평생 살면서 우리 찰진 욕에 자부심을 느낄 줄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