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자모 이름, 알고 계십니까?(전남대학교 명예교수)
서상준 | 조회 518
한글 자모 이름, 알고 계십니까?
서상준(전남대학교 명예교수)
오래 전 연구실로 ‘ㅎ’ 자의 이름을 어떻게 발음해야 하는지를 묻는 전화가 걸려 왔다. ‘히읗’으로 적고 [히읃]으로 발음한다고 일러 주었더니, 다른 데에서 들은 답과 다르다고 해서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느낀 바가 있어 전공 강의 시간에 학생들에게 한글 자모의 이름과 순서를 말해 보라 했더니, 세 명 가운데 한 학생은 도중에 자리에 앉아 버렸고 다른 한 학생은 틀리고 한 학생만 바르게 알고 있었다. 무척 실망스러웠다. 만나는 사람마다 물었다. 초등학교 교사에서부터 대학 교수에 이르기까지. C대학을 수석으로 입학했다고 자부심이 대단했던 교수도, S대학을 나온 교수까지도 모두 다르지 않았다.
실망스러운 일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우리말의 특징을 말해 보라는 문제에 “신라 시대에는 우리말이 없었기 때문에...”로 답을 시작하는 연수 교사도 있었고, <한글 맞춤법>의 원리가 무엇이냐는 물음에 그럴싸한 답을 내놓는 국어교사를 아직까지 본 적이 없다. 한글을 창제한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어디에서 누구에게 물어 보건, 세종이 지원하고 집현전 학자들이 지었다는 대답이 얼추 반이 넘는다. 심지어 한글이 언제 창제되었느냐는 물음에 1400년대, 1800년대라고 답하는 국어 교사도 만난 적이 있었다. 웃어야 할까, 울어야 할까?
그러나 이들만을 나무랄 수는 없다. 아랫물이 흐린 것은 윗물 탓이다. 아래에 훈민정음의 창제와 관련된 세 개의 글을 인용하겠다.
(1) 한글은 조선의 4대 임금인 세종이 1443년에 완성하여 1446년에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내놓았다.
(2) 훈민정음은 세종대왕 자신이 중심이 되어 집현전 학자들과 더불어 세종 25년(1443년) 음력 12월에 창제하였으며, 집현전 학자들로 하여금 이에 대한 해례(解例)를 짓게 하여 세종 28년(1446년) 음력 9월 상순에 반포하였다.
(3) 한글은 세종대왕이 1443년(세종 25년) 음력 12월에 창제하였으며, 집현전 학자들에게 이에 대한 해례(解例)를 짓게 하여 1446년 음력 9월 상순에 반포하였다.
위의 글들은 훈민정음의 창제자, 창제 연대, 그리고 이른바 ‘반포’에 관하여 기술한, 전국의 몇몇 국어국문학과와 국어교육과에서 사용하고 있는 전공 교재의 내용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얼핏 보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글이라고 할 테지만, 이 가운데 훈민정음 창제의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게 기술한 글은 하나도 없다. (1)은 세 가지 사실을 간결하게 서술한, 오류가 없는 글처럼 보이지만, ‘1443년’과 ‘1446년에~세상에 내놓았다’는 대목은 아무래도 창제 사실을 바르게 서술한 것은 아니다.(음력 12월에 창제한 것이 사실이라면, 창제 연도를 1443년이라고 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2)는 한글을 세종과 집현전 학자들이 공동으로 창제했다고 서술하고 있어서 다른 (1)과 (3)의 서술과 차이를 보인다. (1), (3)의 ‘한글’과 (2)의 ‘훈민정음’은 다른 것인가? 그래서 창제자를 다르게 말한 것일까? 또 (1~3)에서 ‘1446년에 세상에 내놓았다’든가 ‘반포하였다’는 대목은 문자 ‘훈민정음’을 말한 것인지, 아니면 해설서 ‘훈민정음’을 말한 것인지의 문제는 접어 두더라도, 적어도 ‘반포’라는 용어는 명확한 근거가 없이 사용한 자의적인 해석이고 용어이다.
일은 이런 데에서부터 꼬이게 되고, 이로부터 쓸모없는 논란과 잘못된 교육이 시작되었다. 누구에게서 배웠느냐, 어떤 책을 읽었느냐에 따라 우리의 지식은 (1)이 되기도 하고, (2)나 (3)이 되기도 한다. 이 정도는 약과다. 여기에 제시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학설’이 난립해 왔다. 학자라는 사람들이 관련 자료(역사 기록 등)를 면밀히 검토해 보지도 않고, 앞사람 따라 하기에 급급하거나 어설픈 내 주장 하기에 몰두하는 사이에, 사실은 왜곡되고 진실은 묻혀 버렸다. 같은 말, 같은 글자를 쓰는 남한과 북한의 한글을 기념하는 날이 10월 9일과 1월 15일로 왜 달라야 하는가.
이건 모두 학자들의 문제다. 생각해 보라. 한글을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는 기록에 따를 수밖에 없는 일인데, 무슨 생각으로 역사 기록을 무시한 ‘주장’을 하는가. 기록마다 차이가 있으면 교차 검증을 하고 보충 자료를 충실하게 검토하면 될 일을, 굳이 말단지엽에 매달리거나 자의적인 해석과 판단을 하는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전해 오는 기록이 우리들의 궁금증을 모두 풀어 주는 것은 아니지만, <실록>과 <해례본> 등의 기록이 명확하고 당사자들의 증언이 하나로 분명한데, 이 자료들을 살펴보지 않았거나 해석을 잘못하지 않고서는 다른 ‘주장’이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이렇게 잘못 알고 잘못 배워 왔다.
이런 것들을 바로잡지 않으면, 자꾸 엉뚱한 쪽으로 이어지게 된다. 우리말이, 우리 문법이 왜 그리 어려우냐고 한다. 그럼 영어와 영문법은 쉽다는 말일까? 우리 맞춤법은 쓸데없이 어렵기만 하다거나 너무 자주 바뀌어서 혼란만 초래한다는 등의 이야기도 흔히 나온다.(일리 있는 푸념이다.) 더욱이 학교에서도 국어 교사가 아니라면 판서나 문건들이 어법이나 맞춤법에 벗어나더라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심지어는 그런 줄조차 모른다. 믿기 어려울 테지만, 어법에 맞게 말하고 맞춤법에 맞게 적는 일을 문법 전공자들만의 일로 치부하는 국어과, 국문과 교수들도 있다. 전공이 아니니 한글을 언제 누가 만들었는지 관심 밖이라는 같은 학과 교수의 말은 충격을 넘어 연민을 느끼게 했다.
하기는 이런 생각들을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기에는 조심스러운 면이 있다. 우리말뿐만 아니라 어떤 언어든 규범을 지켜 바르게 말하고 적으려면 여간해서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조차도 우리말을 아끼고 바르게 사용하려는 태도를 밑바닥에 두고 한 말일 수도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러하다.
이런 빗나간 생각들을 바로잡아 주는 일도 물론 학자, 교육자들의 몫이다. 잘못된 지식의 단초도 그들이 제공했고, 그것을 가르쳤으니, 바른 길로 안내하고 이끄는 일도 모두 그들이 해야 한다.
불편하더라도 교통 규칙을 지켜야 편리하고 안전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처럼, 맞춤법은 문자 생활의 효율성과 경제성을 위해서 우리의 지혜를 모아 만든 사회적 약속이라는 인식부터 갖게 해야 한다. 문법 교육도 지식을 익히는 게 아니라 언어를 바르고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낱말의 정확한 의미도 실제 용례를 통해 파악하고 익힐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틀부터 바꾸어야 한다. 국어 교사에게도 어려운 띄어쓰기를 어떻게 일반인들이 지킬 수 있겠는가. 국문학과 학생들도 어려워하는 문법 용어와 지식 체계를 중학생 고등학생이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배워야 하는가. 발상을 바꾸지 않고 틀을 바꾸지 않는 한, 사실 따로 지식 따로, 교육 따로 현실 따로의 부조리한 우리의 모습은 또 몇 십 년을 그렇게 흘러갈 것이다. 참으로 걱정스럽다.
다시 한글 문제로 돌아가 한글 정보의 대중화와 소통 현실을 직시해 보자. 유튜브는 개방성, 접근성, 내용의 다양성 등에서 우리의 삶 속에 빠르게 자리 잡은 사회 소통망으로, 전통적인 대중 매체의 영향력을 훨씬 뛰어넘는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매체이다. 문제는 여기에 실려 있는 정보가 정제되지 않은 것도 많아서, 논란이 커지고 있다.
한글의 창제와 관련해서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유튜브가 제작, 유통되고 있다. 우리 한글에 관심이 그만큼 높다는 점에서는 환영할 일이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거의 대부분이 검증되지 않은 부적절한 정보를 담고 있어서 심히 우려스럽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전문가들마저도 명명백백한 기록과 동떨어진 주장을 하는 바람에 이것을 바로잡기 위해 온힘을 쏟아야 할 판에, 어설픈 전문가들의 잘못된 지식의 무분별한 전파가 또 얼마나 많은 해악을 끼칠지는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한두 가지 제안을 함으로써 한글과 관련된 총체적 난국을 돌파하고 싶다. 우선 관련 학계가 총의를 모아, 한글 창제의 역사적 사실을 종합적으로 검토, 정리하고 공인하는 일을 해야 한다. 이것을 바탕으로 각급 학교에서 국어와 역사를 통일하여 교육하고, 한글의 참모습을 바르게 알게 해야 한다.
또 하나는 공신력 있는 검증단을 꾸려, 여러 경로를 통해 유통되고 있는 잘못된 정보를 바로잡는 역할을 맡기자. 국내외 각종 교재를 검증하여 오류를 지적하고 바로잡는다든지, 사회 소통망에는 댓글을 달고 시정을 요구한다든지 하는 일을 지속적으로 수행한다면, 성과는 분명히 있을 것이다. 이런 일들은 국가기관, 학술 교육 단체 등이 지혜를 모으면 가능할 것이다.
길다면 긴 세월을 우리말을 공부하고 가르치면서 우리말과 우리글의 기초적인 지식이나 규범을 바르게 알고 실천하는 이가 많지 않은 안타까운 현실을 볼 때마다 자괴감을 떨칠 수 없었다. 이 짧은 글로 책임을 벗어날 수는 없겠지만, 우리말과 우리글에 대한 작은 관심이라도 불러일으키려는 간절한 바람을 표하고, 후일의 기약은 없어도 우리 말글의 앞날이 좋아지길 바라는 마음을 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