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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에 감추어진 창제의 비밀(한국역사유적연구원 고문)

이재준 | 조회 498

 

한글에 감추어진 창제의 비밀

 

이 재준(한국역사유적연구원 고문)

 

세종실록 103권에서 106권의 기록을 보면 세종대왕은 즉위 261444AD 두 차례에 걸쳐 초정에 행행(行幸)한 것으로 나온다. 대왕이 초정에 머문 기간은 121일이었다. (초정 체류 기간이 122, 123일 이라는 견해도 있다)

세종은 청주에 물맛이 후추와 같아 초수라고 하는 곳이 있는데 여러 가지 병을 고칠 수 있습니다는 말을 듣고 1월에 초정행궁을 짓게 하였다. 그해 228일 드디어 집현전 신진학자 성삼문 등 근신을 대동하고 초정리에 행차한다. 왜 성삼문을 데리고 간 것일까.

이해 4월 초정에서의 요양이 효과가 있으니 더 머물렀으면 좋겠다는 대군들의 청이 있었으나 세종은 백성들에게 피해를 줄 것을 염려하여 대궐로 돌아갔다.

1444AD 715일 두 번 째 초정행행에서는 날고기를 금하고 간소한 초정행궁 생활을 하며 지냈다고 한다. 두 번 초정을 다녀간 후에도 또다시 행차하시라는 신하들의 건의에도 불구하고 세종은 백성들에게 폐를 끼친다며 행차를 하지 않았다.

대왕은 이 기간 동안 초정에서 단순히 눈병 치료에만 전념했던 것일까. 한 번도 아니고 왜 두 번씩이나 초정에 와서 적지 않은 날을 보냈을까. 분명 여기에는 알려지지 않은 역사의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당시 속리산 복전암에는 신미대사(信眉大師)가 주석하고 있었다. 신미는 과연 누구인가? 세종은 소헌왕후의 명복을 비는 내불당을 궁 안에 짓고 신미를 주석케 했다. 그리고는 자신이 제일 좋아했던 능엄경을 강독받기도 했다. ‘이 경을 읽으면 나라가 평안해 지며 백성들의 삶이 안정을 이룰 수 있다는 신미의 강독에 매료되었다. 세종은 겉으로는 세상을 떠난 부인의 명복을 빈다고 하였지만 속셈은 다른데 있었다.

신미는 파스파 문자에 능통한 승려였다. 그리고 성리학’, ‘성운학’, 그리고 '성명기론'에 정통했다고 한다. 똑똑한 성삼문을 데리고 간 것은 신미와 조우케 함으로써 훈민정음창제를 마무리 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세계적인 한글 학자 정광교수(전 고려대 교수)원나라 때 중국인에게는 파스파문자로 몽골어를 배우게 하고, 몽골인들에게는 파스파 문자로 한자 발음을 적어 한자를 배우게 했다. 이것이 고려에 전달돼 고려인도 파스파문자를 잘 알고 있었다. 세종에 이르러서도 파스파 문자는 한자의 발음을 읽어주는 중요한 발음기호였다라는 이론을 주장한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하면서 신미는 절대적인 언어학자였던 것이다.

신미의 내불당 상주는 유학자들의 큰 반발을 샀다. 결국 신미는 속리산으로 돌아갔으며 한글창제를 노심초사했던 세종의 신미에 대한 그리움은 커져갔다. 중신들의 비난을 받지 않고 신미를 불러 훈민정음 창제를 마무리 하는데 적당한 장소가 없을까. 그것이 안질 치료로 위장한 초정의 행행였던 것이다.

정광 교수는 세종이 가족들과 만든 것은 자음만 27(언문 27)였다. 모음자는 7자였다. 신미는 모음을 11자로 해서 자음 17, 모음 11자의 '훈민정음'을 완성시켰다고 했다. '훈민정음'이 파스파 문자와 비해서 오랫동안 생명을 갖고 우리말 표기에 이용되는 것은 신미 스님이 이 모음이라는 '중성'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이를 중심으로 문자를 만들었기 때문이다라고 역설한다.

만약 신미대사가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지 않았으면 우리 한글의 생명력은 짧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세계에서 가장 과학이고 훌륭한 한글이 이루어진 근원에는 신미대사의 공이라고 역설했다.

세종은 문종에게 신미대사에게 사상 유래 없는 칭호를 내리라고 유언했다. 문종은 즉위년(1452) 76일 유명을 받아 신미에게 '선교종도총섭(禪敎宗都摠攝) 밀전정법(密傳正法) 비지쌍운(悲智雙運) 우국이세(祐國利世) 원융무애(圓融無礙) 혜각존자(慧覺尊者)'라는 칭호를 내렸다. 우국이세(祐國利世)'나라를 돕고 세상을 이롭게 했다.'는 뜻인데, 유교국가에서 줄 수 있는 칭호로선 극찬이다.

신하들은 아무리 선왕(세종)의 뜻이지만 승려에게 이런 칭호를 내림을 부당하다고 상소했다. 문종은 그해 8월 신미의 칭호에서 '우국이세'를 삭제하도록 하고 '대조계(大曹溪) 선교종도총섭(禪敎宗都總攝) 밀전정법(密傳正法) 승양조도(承揚祖道) 체용일여(體用一如) 비지쌍운(悲智雙運) 도생이물(度生利物) 원융무애(圓融無礙) 혜각종사(惠覺宗師)'라고 했다.

신미에게 내려진 칭호를 통해 세종이 그의 공로가 국가를 위한 큰 이로움을 주었다는 치하를 찾을 수 있다. 대사는 훈민정음을 가지고 능엄경언해, 목우자수심결언해, 몽산화상법어약록언해, 불설수생경, 사법어언해를 저술했으며 수양대군과 함께 석보상절, 선종영가집언해, 원각경언해, 법화경언해, 월인천강지곡, 월인석보등을 저술했다.

신미대사는 충북 영동출신이다. 동생은 세종의 총애가 두터웠던 괴애 김수온이다. 이 시기 영동 출신 난계 박연은 세종과 더불어 아악을 정리하였다. 잃어버린 국악기를 재현하고 아악을 정리했다.

세종실록에 아악 악보를 실린 것은 우리가 대단한 민족이라는 것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세종은 서양보다 200여년 앞서 국악 오케스트라를 편성, 궁중에서 연주했다.

백성들을 사랑한 위대한 세종임금. 그 덕치가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대한민국을 세계 속에 가장 위대한 민족의 길로 나갈 수 있는 문화력의 원천을 마련해 준 것이다. 훈민정음 창제가 세계적인 명소 초정에서 마무리 지어진 것을 또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