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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창제의 큰 뜻(서울대학교 법대 명예교수)

이상면 | 조회 496

 

훈민정음 창제의 큰 뜻

 

이상면(서울대학교 법대 명예교수)

 

세계에서 <문자의 날>을 국경일로 정하고 하루를 쉬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을 것이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 28자를 창제하여 거의 모든 음가를 적어낼 수 있게 되었고, 누구나 쉽게 배워서 읽고 쓰는 데 편리하게 하였으니 민족적 자긍심을 가질 만도 하다. 지금은 자모가 24로 줄어서 각종 음가를 표기해내는 것이 그때만 못한 점이 있기는 하지만, 인터넷 시대에 빠르게 타자해서 전송할 수 있으니, 서양 자모로 쳐서 자기네 글로 변용해야 하는 이웃 일본이나 중국에 비하면 얼마나 복된 일인가.

훈민정음 28자를 창제한 것은 이처럼 누구나 뜻하는 바를 소리 내는 대로 쉽게 쓰고 읽게 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한자 음을 음절에 맞추어 표기하는 것이 부수적인 목적이었다. <여린 히읗><여린 비읍>은 우리 말보다 한자 표기에 많이 사용되었던 것 같다. <머리 있는 옛 이응>도 한자 표기에 많이 사용되었는데, 그런 음가를 별로 쓰지 않게 되자 차차 <머리 없는 이응>으로 통합되었다. <삼각형 여린 시옷>도 그 음가가 점차 분명치 않게 되어 사라졌는데, 지금도 <가슴> 같은 단어에서 그 음가를 느낄 수 있다.

훈민정음 28자 중 쓰지 않게 된 4자 가운데 조선 말엽까지 애용된 것은 모음 <아래 ᄋᆞ>였다. <아래 ᄋᆞ>는 원래부터 그 음가가 그리 뚜렷한 것은 아니었지만 쓰기에 편해서 그랬던지 그 오랜 세월을 두고 널리 애용되었다. 일제는 그 음가가 분명하지 않다는 이유로 1912년 이른바 <보통학교 조선어철자법>을 만들어서 <아래 ᄋᆞ><>로 대체해서 쓰게 했다. 한글 학자 주시경이 1907년에 <아래 ᄋᆞ>의 음가를 <><> ‘중간 음으로 보고 쓰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여겨서 제거하기로 했다지만, <아래 ᄋᆞ>를 그가 말한 중간 음과 차이가 큰 <>로 바꾸어 쓰게 했으니, 이런 저런 부작용이 적지 않게 나타났다.

<아래 ᄋᆞ>는 아직도 서울 일원에서 나이 든 이들이 <하고><ᄒᆞ고>로 발음하는 등 그 음가가 남아있다. 지금도 지방에 따라서는 <아래 마을><아랫 ᄆᆞᆯ>, <위 마을><웃 ᄆᆞᆯ>이라고 하는 등 그 음가가 존재한다. 지금도 제주도 방언에는 <아래 ᄋᆞ>가 고스란히 살아 있다.

일제가 1912년 초등학교 교육에서 <아래 ᄋᆞ>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자, 하늘을 받들며 천손(天孫)을 자부하던 우리 민족은 점차 <하ᄂᆞᆯ님><하ᄂᆞ님>도 제대로 적어내지 못하고 발음도 제대로 못하게 되는 신세가 되었다. <하ᄂᆞᆯ님>을 받들던 각 종교 단체에서는 <하ᄂᆞᆯ님> 대신에 <하날님>으로 쓰게 되었지만, <하늘님> <하눌님> 등으로 표기하기도 했다. 발음 편의상 대개 <하나님> <하느님> <하누님> 등으로 부르게 되었다.

3.1 만세운동 후에 일제가 이른바 문화정치를 한다며 언론 출판 결사의 자유를 일부 허용하자, <조선일보><동아일보>가 창간되었고 출판사도 많이 생겨났다. 그 무렵 일제는 <한글맞춤법통일안>을 만들어서 각종 출판물에서 <아래 ᄋᆞ>를 쓰지 못하게 했다.

일제는 3.1운동을 주도한 손병희 등 천도교 지도자를 대거 투옥하고 <교주>제를 폐기하고 그 대신 임기 3년의 <교령>제를 채택하게 했다. <교주>를 받들며 신앙으로 단결하는 것을 방지하고 <교령> 자리를 놓고 서로 다투게 만들어 분열을 조장하려는 것이었다.

그 무렵 일제와 호응하며 천도교 개혁의 기수로 등장한 이돈화가 강연과 저술 활동을 왕성하면서 <하ᄂᆞᆯ님><한울님>으로 표기하자, 교도들은 점차 그렇게 표기하게 되었다. 그는 <하눌님>으로 써도 될 것을 굳이 <한울님>으로 쓴 이유로 <한울>에는 <우리> <울타리> <우주> 등 공간과 공동체 개념이 들어있어 교리를 깊게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천도교도는 기독교도보다 신도 수가 열 배나 넘었는데, 천도교에서 <한울님>으로 칭하게 되면, 하늘을 숭상하는 민족정신이 흐려질 우려가 있었고,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채택한 애국가에 나오는 <하나님>과 달라져서, <갈라서 통치한다>는 일제의 정략에 들어맞는 것이었다.

수년 전 어느 학자가 동학 경전을 풀이하면서 천도교 측에서 <한울님>을 사용하는 것이 표준어에도 맞지 않고 촌스럽게 들린다고 평을 해서 천도교도의 빈축을 샀다. 천도교도가 습관에 익은 대로 <한울님>으로 부르더라도, 표기만큼은 <하눌님>으로 하는 것이 경전에 쓰인 바 <하ᄂᆞᆯ님>의 보편적인 뜻에 부합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하ᄂᆞᆯ님>이 여러 가지로 표기되어 혼란이 일어난 것은 일제가 1912년부터 <아래 ᄋᆞ>를 없애는 정책을 취했기 때문이었다. <아래 ᄋᆞ>가 지금껏 유지되었다면 애국가에서도 각 종단에서도 우리 고유의 발음에 맞게 <하ᄂᆞᆯ님> 또는 <하ᄂᆞ님>으로 쓰고 있었을 것이니, 나라와 사회의 화합을 위해 좋은 일이 아니었겠는가.

훈민정음을 창제한 목적이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소리 나는 대로 쉽게 쓰게 하는 것이었고, 부수적으로 중국어 발음을 음절로 끊어서 표기하는 데 있었으니, 지금이라도 잃어버린 4자를 회복하여 사용하면 어떨까? <아래 ᄋᆞ>를 사용하면 <하ᄂᆞᆯ> <하ᄂᆞ님> 등을 우리 고유의 <아래 ᄋᆞ> 발음으로 회복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여린 시옷>으로 <z>발음을 표기하고 <여린 비읍>으로 <v>를 표기하는 등 훈민정음 28자를 다 쓰게 되면, 한글 자모로 외국어를 표기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지고, 글자가 없는 먼 나라 소수민족이 한글을 가져다 쓰는 데도 편리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