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 사랑, 나라 사랑(사)한국수필가협회 명예 이사장)
장호병 | 조회 451
훈민정음 사랑, 나라 사랑
장호병
(사)한국수필가협회 명예 이사장
훈민정음은 20세기에 들어 한글로 불리어졌다. 취학 전 그 한글 처음 깨우칠 때의 기쁨이 기억에 생생하다.
닿소리 열네 자를 가로로, 홀소리 열 자는 세로로 하여 조합된 “가갸거겨고교……”를 천자문 외듯 기다란 꼬챙이로 짚어가며 소리 내어 읽었다. 받침연습을 조금만 하였는데도 웬만한 글씨는 다 읽고 쓸 수 있었다. 천자문은 복습으로 외우기만 했지 책 밖을 벗어나면 글자를 구분하기도 어렵고 쓰는 일은 더 어려운 일이었는데 말이다.
요즘 아이들은 유치원 들어가기 전에 낱말 카드나 길거리의 간판을 보고 한글을 다 깨우친다. 이것은 한글이 쉬워서라기보다는 음성학에 근거한 문자의 조립이 단순하면서 매우 과학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지구상에 7천4백여 종의 언어가 존재한 것으로 알려졌다. 교통 통신의 발달로 잦은 왕래와 교역 때문에 경쟁력이 약한 언어는 점차 퇴출당하여 현재는 6천여 종이 사용되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마저도 2050년까지는 90%가 사라질 것으로 전망된다고 한다. 문자를 갖지 못한 언어의 소멸 속도가 빠를 수밖에 없다. 문자를 갖춘 언어라고 안심할 수만은 없다. 382종 문자 중 현재 사용되는 문자는 28종에 불과하다. 훈민정음이 창제되지 않았다면 한국어 또한 소멸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훈민정음 창제 당시로 시계를 돌려본다.
표의문자인 한자는 강희자전에 4만 6천여 자가 수록되어 있고 시대변화에 맞추어 더 만들어지기도 한다. 평생을 공부해도 글자를 익힐 시간이 모자란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양반의 자제나 두뇌가 명석한 젊은이가 아니고서는 엄두조차 내기가 어려웠다. 백성 누구나 자신의 뜻을 펼 수 있는 문자를 창제하겠다는 뜻을 세운 것만으로도 세종대왕은 성군임이 틀림없다.
당시 조선 선비들에게는 훈민정음이 오히려 너무 쉽다는 이유로, 누구나 금방 깨우칠 수 있어 한나절 글 또는 언문이라 하여 낮추어 보았다. 그 언저리에는 새로운 식자 그룹이 탄생할 것을 염려한 때문이 아니었을까. 예나 지금이나 기득권 사람들은 그 진입장벽을 견고히 하는 데 몰두한다. 글자 깨우치기에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으니 남은 시간을 심오한 내용의 학문 연구에 시간과 열정을 쏟았어야 했다. 지도급 선비들의 악의적 폄훼를 물리치고 조정에서 과거 시험 답안지를 훈민정음으로 작성하게 하였더라면 우리나라의 학문은 더 심오해졌고 세계적 학자들이 줄을 이어 나왔을 텐데. 앞날을 내다보지 못한 일은 내심 안타까운 일이다.
한국의 문맹률이 세계 최저치를 기록하는 데는 훈민정음이 낳은 한글 덕분이다. 유네스코는 1989년 세종대왕상을 제정하여 인류의 문맹 퇴치에 이바지한 단체나 개인에게 매년 시상하고 있다. 그리고 1997년에는 『훈민정음 해례본』을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하였다. 평소 공기나 물의 중요함을 잊고 살듯 정작 국내 생활에서는 한글을 있게 한 훈민정음에 고마움을 느끼는 사람이 거의 없다.
한글은 음소문자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소리를 문자로 표현할 수 있다. 특히 컴퓨터나 스마트폰에서의 문자입력 속도가 어떤 언어보다 편리하고 빠르다. 우리나라가 IT 강국이 된 것은 많은 양의 정보를 신속하고도 다양하게 처리하고, 기록 전달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 한글이 정보화 시대에 가장 적합한 문자임을 세계인들이 주목하고 있는 이유이다.
한글은 문자를 통한 경험과 지식, 사상, 문화의 축적과 배분을 가장 빠르게 순환시킬 수 있게 했다. 누구나 이런 콘텐츠의 생산자가 될 수도, 수혜자가 될 수도 있는 세상이 되었다. 그 중심에는 이런 문화 환경에 가장 적합한 한글이 있었다. 콘텐츠는 다른 콘텐츠와 결합하면서 또 다른 콘텐츠로 융합되어 실시간 분배와 소비가 이루어졌다. 이런 창의성의 선순환이 음악이나 영화, 드라마 등 문화 분야 전반으로 확대 재생산되면서 K-Pop, 한류 열풍을 만들어나가고 있다.
과거에는 국제관계에서 군사력이나 정치력이 영토확장에 큰 변수로 작용하였다. 교통 통신의 발달과 여행 자유화의 바람을 타고 문화유적, 자연환경 등이 주목을 받더니 이제는 문화 콘텐츠가 디지털 영토확장의 주역이 된 것을 실감한다. 세계인들의 주목을 받는 우리의 문화 콘텐츠 이면에는 훈민정음 한글의 기여가 컸음을 부인할 수 없다.
“自動車 자동차 engine 엔진 ちょうし죠시 좋다.”는 것과 같이 한글은 4개국어를 섞어 써도 전혀 어색하지가 않을 만큼 전혀 다른 언어와의 결합이 자연스럽다. 다른 문자와 결합하여 번뜩이는 기지를 발휘하는 데도 탁월하다.
일어서自! (서울의 버스나 전철역에 부착된 광고문)
중소 企UP (서울도시철도공사의 광고문)
스타夜 놀자! (서울동물원의 광고문)
중랑천愛 놀자 (중랑천 광고문)
한국어나 한글은 외국어와의 혼용이 자연스러워 외국어에 의해 훼손되기도 쉽다. 기발함, 표현의 자유를 광고에서까지 간섭하는 것은 심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한국어의 순화와 사용에 모범을 보여야 할 국가기관은 이 문제에 좀 더 신중해야 한다. 광고 문안을 쓸 때나, 새로운 제도나 용어를 만들 때 아름다우면서 이해하기 쉬운 우리말을 사용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홈리스homeless는 물론 어반 테라스 urban terrace, 트라이 아웃 센터 tryout center, 시니어 패스senior pass, 문탠로드 moon-tan road, 마린시티 marine city 등의 생소한 외국어를 국가기관에서 행정용어로 사용하고 있는 것은 문제다. ‘시니어 패스’보다야 ‘어르신 교통카드’가 훨씬 이해하기 좋은 말이 아닌가. ‘타슈’는 외국어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타십시오.’란 뜻의 충청도 사투리로 대전시가 시민들에게 무상으로 대여하는 자전거를 이른다.
처칠은 미래의 제국은 정신의 제국이 될 것이며 언어가 패권의 중심이 될 것이라 말했다. 음악 영화 드라마 등 한류 콘텐츠에 힘입어 한국어는 세계인들의 귀에 친근한 언어가 되어가고 있다. 세상 거의 모든 소리를 표현할 수 있는 한글은 이미 찌아찌아족과 체팡족, 라후족의 언어를 한글로 표기하고 있다. 또 100여 나라에서 운영되고 있는 한국어 학당이 2천여 곳에 이른다니 언어패권√국가를 꿈꾸어 봄 직하다.
어느 나라든 국어교육 정책이 있다. 한국인이라면 피부색이 어떠하든 한국어를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어는 소통을 위한 도구이자, 한국 사회의 문화를 담아내고 한국인으로서의 사고의 틀을 형성함으로써 사회통합을 이루어 내게 한다. 국어 방치는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 확보를 위해서나, 사회통합을 위해서나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
자신의 문자를 가진 언어가 세계에서 몇이나 되랴. 가장 과학적인 글자, 훈민정음을 사랑하는 일은 한국인의 책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