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억 7천(세종특별자치시교육감)
최교진 | 조회 536
3억 7천
최교진(세종특별자치시교육감)
“너는 글 잘 모르니까 내가 알아서 할게!” 고마운 친구와 화장품 가게를 시작했다. 명의도 내 이름 카드도 내 이름으로 해 준 친구가 너무 고마웠다. 어느날 친구는 은행 대출을 해서 도망갔고 나는 3억 7천 만원의 날벼락을 맞았다. 아들 방까지 빼서 빚을 갚으며 ‘글만 알았어도… 글만 알았어도…’ 가슴을 쳤다. 나는 기를 쓰고 공부를 시작했다. 이제는 은행도 혼자 가고 싸인도 한다. 사기 당한 돈 3억 7천이 글 배우게 된 값이다.
몇 해 전 ‘전국 성인문해교육 시화전’에 나온 김길순 할머니의 글이다. 글을 몰라 당한 억울함이 절절히 다가온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글을 몰라 이런 일을 당하는 사람이 있겠나 싶다. 그러나 2021년 교육부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 18세 이상 인구 중 비문해율이 약 4.5%라고 한다. 글을 모르는 사람의 대다수가 노년층이다. 70대의 비문해율은 13.7%이며 80세 이상은 49.3%나 된단다. 한글이 세상에서 가장 배우기 쉬운 글자라는데 아직도 글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니 믿고 싶지 않은 통계다.
많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한맺힌 사연을 안고 있다. 가난해서 못 배우고, 여자라서 못 배우고, 전쟁 때문에 못 배우고, 하루 하루 먹고 살기 바빠 못 배웠다. 못 배운 탓에 멸시와 차별을 받아도 그러려니 했다. 많이 배운 잘난 사람들이 판검사가 되고 위정자가 되어 옳지 못하게 권력을 휘둘러도 아무말 못했다. 학벌이 지위를 결정하는 세상에서 가장 밑바닥 삶을 운명으로 여길 수 밖에 없었다. 못 배웠다는 이유로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빼앗기고 살았다. 3억 7천만원 정도가 아니라 인간다운 삶을 송두리째 빼앗긴 것이다.
자식들에게는 못 배운 설움을 물려주지 않으려고 모질게 공부를 시켰다. 그 교육열 덕분에 노년층을 제외하고 우리나라의 비문해율은 세계에서 가장 낮다. 그런데 문제는 실질적 문해력이 걱정스러운 수준이라는 것이다. OECD 국제성인문해조사(IALS)에서는 문해력을 "일상적인 활동이나 가정, 일터, 지역사회에서 문서화된 정보를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정의하는데 우리나라 성인들의 실질적인 문해력이 매우 낮아서 일상생활에 필요한 문해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 20%나 된다는 것이다. 글자를 알아도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글자를 모르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도대체 왜 한글이라는 우수한 문자를 가진 나라가 이렇게 부끄러운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일까? 어떤 이는 학교에서 잘 못 가르쳐서 그렇다고 하고, 어떤 이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책을 안 읽어서 그렇다고 한다. 말할 필요도 없이 학교에서 모든 배움의 바탕이 되는 문해력을 책임지고 길러 주어야 한다. 책 읽는 문화를 넓히는 일도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우리 글과 말을 누구나 알 수 있도록 쉽게 쓰는 일이다.
김수업 선생님은 이오덕 선생님과 함께 우리 말과 글을 살리기 위해 애쓰신 분이다. 선생님이 이탈리아 여행 중에 경험한 이야기는 우리의 말글살이를 돌아보게 한다. 선생님이 이탈리아에서 병원 신세를 질 일이 있었다고 한다. 같은 병실에 있던 환자 중에 고등학생이 있었는데 회진 온 의사와 병상일지를 바탕으로 논쟁을 하더라는 것이다. 그런 일이 가능한 까닭은 병상일지를 고등학생도 알 수 있는 쉬운 말로 쓰기 때문이다. 병상일지를 보고 자신에 대한 치료방법과 처방한 약에 대해 의견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상상도 하기 어려운 이야기다. 병원 뿐 아니라 법률, 학문, 정책 등 자기들만 알아듣는 어려운 말을 쓰는 것을 전문성으로 여긴다. 그 분야의 전문가만 알 수 있는 말도 있겠지만 쉽게 써도 되는 말도 어렵게 쓴다. 그 밑바탕에 깔린 생각은 훈민정음 반포를 반대했던 학자들이 가진 차별주의, 사대주의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런 말글살이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의 삶을 바꿀 수 있다.
세종대왕께서 ‘이르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전하지 못하는 백성들을 가엽게 여겨' 훈민정음을 만드신 지 590년이 다 되어 간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 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을 창제하신 뜻을 잇는 길은 모든 국민이 우리 글을 제대로 알도록 교육받을 권리를 보장하는 일과 함께 삶과 관련이 있는 말과 글을 누구나 알기 쉽도록 바꾸는 일이다. 글을 몰라 3억 7천만원을 사기 당하는 일이나, 글을 이해하지 못해 인간다운 삶을 빼앗기는 일은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