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 역사상 5000년 래 제1대 사건(전 법제처장)
이석연 | 조회 474
「한민족 역사상 5000년 래 제1대사건」
이 석 연(법무법인 서울 대표변호사, 전 법제처장)
일제강점기 단재 신채호 선생은 고려 인종 때에 일어났던 서경천도운동과 뒤이은 묘청의 난을 ‘조선역사상 일천년 래 제1대사건’이라 평가한 바 있다.
나는 세종대왕의 훈민정음(한글) 창제를 한민족 반만년 역사상 제1대사건이라고 표현하고자 한다. 세종의 최대 치적이자 우리의 위대한 문화유산이라는 평가만으로는 훈민정음 창제 의의를 부여하기에는 한참 부족하다. 만약 우리에게 언어만 있고 글이 없었다면, 또한 지금까지 글을 한문으로 쓰고 있다면 우리는 민족의 정체성이나 우수성에 대해 자부심을 가질 수 없을 것이고 아마 지금까지도 중국의 속국 쯤으로 치부되었을 것이다.
현금 한국이 세계적인 IT강국으로 발돋움한 것도 한글에 힘입은 바 크다. 컴퓨터 자판에 모두 들어가는 문명어는 알파벳과 한글뿐이다. 한글은 휴대전화의 작은 자판으로 문자메시지를 보내거나 정보검색 등을 할 때에도 타 문자보다 휠씬 능률적이다. 또한 한글의 장점 중 가장 뛰어난 것이 소리의 표현이다. 현존하는 문자중 한글만큼 다양한 소리를 표현할 수 있는 글은 없다. 이는 훈민정음이 창제될 당시 주변 나라의 말 즉 외국어인 중국어와 일본어, 몽골어, 만주어 등을 우리의 소리로 표현하는 것이 창제의 중요한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뜻이나 모양보다 소리 내는 것에 치중한 것이다. 그 결과 현재 모음과 자음 24자만 가지고도 1만 1000 내지 1만 2000 가지의 소리를 표현할 수 있는 세계 최고의 글이 되었다.
이렇게 훈민정음(한글)은 세계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과학적인 글자로 인정받아 유네스코에서는 훈민정음 창제자의 이름을 딴 상을 제정하여 문맹 퇴치에 공헌 한 사람에게 매년 ‘세종대왕 문맹퇴치상’을 수여하고 있다. 만약 알파벳의 창제자가 있었다면 이 상의 명칭은 알파벳 창제자의 이름이 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훈민정음은 창제자가 알려져있는 유일한 글이기도 하다.
우리는 흔히 훈민정음은 집현전 학자들이 주가 되어 만들었고 세종은 그들이 훈민정음 창제에 전념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어 주고 관리 감독했을 뿐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이는 전혀 사실과 다르다. 세종실록 24년 12월조의 기록에도 “이 달에 임금께서 친히 28자를 만들었는데 그 글자는 고전을 모방했다”고 되어있다. 훈민정음 창제는 언어학자 수준의 지식을 지닌 세종이 직접 주도했고 정인지, 신숙주, 성삼문, 박팽년, 이개, 최항, 이선로, 강희안 등의 소수의 집현전 학자들과 왕실 가족들이 이를 보좌했다.
왕실 가족으로는 문종, 수양대군, 안평대군이 관여했으며 특히 세종의 딸인 정의공주가 언문으로 구결(口訣)을 표음하는 문제를 해결했다 해서 은상을 받은 기록까지 보인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들면서 한밤중에 궁녀를 불러다 놓고 여러 소리를 내도록 시킨 다음 입과 혀 그리고 목구멍의 모양을 살폈다는 일화가 전할 정도다. 세종이 훈민정음 반포(1446년) 후 불교의 진리를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최초의 국문 시조집인 ‘월인천강지곡’을 직접 지은 것에서도 정음 창제를 주도했음을 알 수 있다.
훈민정음 창제 과정은 실록에 어떤 기록도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그 이유는 첫째 명나라에 알려질까 두려워했던 것이었고 다음으로 창제 과정에서 쏟아져 나올 신하들의 상상을 초월한 반대목소리 였을 것이다. 실제로 훈민정음 창제 사실이 알려지자 최만리, 정창손 등 집현전에 오래 근무한 학자들이 상소를 올려 훈민정음 반포를 격렬히 반대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세종이 극소수의 집현전 학자들과 왕실 가족들만의 보좌를 받은 이유를 알 수 있다. 훈민정음 창제야 말로 중국에 대한 사대로부터 벗어나 민족의 주체성과 독창성을 발휘하려는 세종의 의지와 백성의 삶을 깨우치려는 애민의식의 발로 없이는 불가능한 작업이었다. 그 점에서 우리는 세종의 위대함을 새삼 되새기게 되고 더 나아가 세계적인 제왕의 반열 중 세종이 가장 선두그룹에 자리매김 되어야 함을 강조하고자 한다.
세계 최강국인 미국국민 중 거의 20퍼센트가 영어를 제대로 쓸줄 모르는 문맹인이다. 하지만 한국에는 문맹이 거의 없다. 이 점만으로도 훈민정음 창제는 한민족 5000년 역사상 일대 쾌거가 아닐 수 없다!